올해 마지막 국제학회 장소가 독일 뮌헨으로 정해졌다는 메일을 받은 날, 저는 보호색처럼 늘 붙어 있던 ‘저가 항공권 알림’ 브라우저 탭을 다시 열었습니다. 연구실 예산이 빠듯해 왕복 항공료만 확보해도 내 몫을 다한 셈이었지만, 발표 일정이 새벽 세션이라 도착 翌일엔 반드시 호텔에서 한숨 자야 했습니다. 항공권과 숙소를 따로 고르면 170만 원 가까이 나오는 걸 보고 한숨이 절로 났죠. 그런데 알고리즘이 잽싸게 던져 준 광고 하나가 눈을 붙들었습니다.
“뮌헨 왕복 + 3박 호텔 + 조식, 대학원생 전용 패키지 79만 원!”
링크를 누르자 ‘EduTravel Bridge’라는 사이트가 열렸는데, 첫 화면에 “다년간 유럽 학회 전세기 운항”이라는 커다란 문구와 함께 지난 시즌 포스터들이 슬라이드쇼로 지나갔습니다. 등록증 영문명을 입력하면 20 % 추가 할인 쿠폰까지 준다기에, 저도 모르게 이름을 타이핑하고 있었습니다.
전세기라는 단어가 품은 이질감
상세 페이지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왕복 직항 전세기”라는 문구였습니다. 하지만 대한항공과 루프트한자가 이미 같은 노선에 코드셰어를 깔아 놓은 상황에서, 별도 전세기가 또 뜰 이유가 있을까요? 의문이 스쳐 갔지만, 코스튬을 벗기듯 친절한 FAQ가 순식간에 걱정을 눌렀습니다. “전세기 좌석 중 일부가 남아 대학원생에게만 공급” — 귀에 달콤했습니다.
호텔 정보는 주소가 없이 ‘시내 4 성급 급행’으로만 표기돼 있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구글 맵에 검색해 보니 ‘City Hotel Munich’ 같은 뭉뚱그린 이름만 잔뜩 뜨더군요. 이때부터 가슴 어디선가 삐걱대는 소리가 났습니다.
이메일 한 통이 키운 불안
결제 버튼을 누르기 전, 저는 사이트 하단의 고객센터 이메일로 “호텔 상세 주소를 알려 달라”는 문의를 보냈습니다. 30 분도 지나지 않아 답장이 도착했는데, 헤더를 열어 보니 발신 도메인이 edutravelbridge.help였습니다. 메인 사이트가 .eu인데 고객센터만 .help? 도메인 스펠링을 다시 확인하고 있을 때, 답 메일의 발신 시간과 Date 헤더가 3시간 이상 엇갈려 있는 것도 보였습니다. 메일 서버 시간이 뒤죽박죽이면 대개 임시 서버나 무료 호스팅을 많이 쓰더군요.
그래도 혹시 모를 … 그리고 나타난 장치
주말 특가라고 해서 결제 마감이 두 시간 남았다는 타이머가 화면 아래서 또르르 굴러가고 있었습니다. 할인 폭이 크게 줄어들면 나중에 교수님께 결과보고를 하기 더 어려울 것 같아, 저는 ‘우선 좌석만 잡겠다’는 마음으로 카드 정보를 절반쯤 입력했습니다. 그 순간 브라우저 주소창 왼쪽에 잠깐 붉은 자물쇠가 반짝이며 “혼합 컨텐츠” 경고가 떴다가 사라졌습니다. HTTPS 페이지 안에 HTTP 이미지나 스크립트가 섞여 있을 때 보이는 메시지였죠. 한 번 스치고 지나갔지만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이어 “서울 출발일·전세기 편명”만이라도 알려 달라고 채팅에 다시 남겼습니다. 담당자는 “출발 24시간 전에 일괄 고지한다”는 답을 복사해 붙여 넣은 듯 반복했고, 대신 “세미 패키지는 4만 원 추가 할인 가능”이라며 역으로 가격을 더 깎아 주겠다고 했습니다. 순간 ‘가격이 낮을수록 더욱 의심하라’는 원칙이 조사처럼 떠올랐습니다.
데이터베이스 한 구절이 완성한 퍼즐
마지막으로 떠오른 건 그동안 피상적으로 귀에 익혀 두었던 먹튀위크였습니다. 별 생각 없이 업체명을 입력했는데, 서너 달 전 “학회 전세기 패키지”라는 유사 사례가 검색 결과에 걸렸습니다. 팝업 타이머 디자인, 문의 메일 도메인, 그리고 무엇보다 마감 독촉 멘트가 판박이였죠. 피해자들은 “출발 3일 전에 패키지 취소 통보 후 환불 지연”이라는 경험담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그제야 화면 속 79만 원이 “저렴”이 아니라 “선불 보증금”으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평온해진 통장, 그리고 학회는 무사히
결국 저는 결제 창을 닫고 문의했던 메일과 채팅 기록을 파일로 저장해 학과 사무실에 공유했습니다. 사무실 담당자는 “이미 다른 대학원생이 같은 패키지를 문의해 왔다”며 고맙다고 했습니다. 저는 루프트한자 학생 요금과 도심 호스텔을 따로 예약했고, 총액은 30만 원쯤 더 들었지만 적어도 편명·주소·환불 규정을 모두 손에 넣었습니다.
뮌헨 공항에 도착해 라면보다 싼 기숙사 조식을 떠올리며 웃었지만, 여권에 찍힌 입국 도장이 ‘79만 원짜리 환상 비행’보다 훨씬 선명하고 안전해 보였습니다. 다음에 누가 “전세기니까 가능하다”는 말로 저를 유혹하더라도, 저는 반드시 편명부터 확인할 것입니다. 실험 데이터처럼, 여행 정보도 검증되지 않은 값은 쓰지 않는다는 교훈을 이번에 단단히 얻었으니까요.